절차적 민주주의의 핵심은 국민이 직접 대통령과 의회 의원을 뽑는 것이지만, 국민이 주인인 민주주의 정신의 요체는 국민이 납세의무뿐 아니라 공무원과 공직자가 특권을 누리지 않고 상식과 소명에 맞게 책무를 다하는지를 감시・감독할 납세자권리를 갖는 것이다.
1. 납세자권리 중 가장 기본은 공무원이 국가 예산을 집행할 때 반드시 영수증을 첨부토록 하고 이를 철저히 감사하는 것이다. 영수증을 첨부하지 않으면 공무원이 공동체의 운영재원인 세금을 횡령하거나 오남용해도 국민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특수활동비를 ‘세금횡령 면책특권’, ‘감사 포기 예산’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청와대는 감사원 감사결과 아무런 지적도 없었다고 주장하지만, 애당초 특수활동비는 감사원의 형식적 감사만 가능한 불합리한 예산의 전형이다.
특활비는 조선시대 왕의 내탕금과 동일하다. 차이가 있다면 조선시대에는 왕만 내탕금을 사용했지만 21세기 한국에서는 입법부와 사법부, 행정부 고위공직자 모두 사용한다는 점이다. 연간 2396억원의 예산을 사금고처럼 영수증 없이 사용하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 사실 국가예산지출중 영수증을 첨부할 수 없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는 외교 안보적 목적상 밝혀지면 곤란한 불가피한 현금 사용의 경우 이외에는 거의 없지만, 3부의 고위공직자는 그 명분 뒤에 숨어서 불합리와 부정부패의 특권을 구가하고 있는 셈이다.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라면, 청와대 역시 외교 안보상의 이유를 제외하고 특수활동비를 사용할 일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과 고위공직자들이 세금으로 금일봉을 주거나 선물을 주면서 생색을 내더라도 영수증을 첨부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영수증 없는 예산을 용인하는 것과 비공개할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다. 검찰이 수사목적의 예산사용을 비공개로 할 수 있지만 이 경우에도 예외 없이 영수증을 첨부하여 그 예산집행의 결과가 입증돼야 한다는 얘기다.
노르웨이 총리실은 납세자연맹의 질의에 “총리가 영수증을 첨부하지 않으면 사임하거나 탄핵을 당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이처럼 제대로 된 민주국가에서 공무원에게 예산을 영수증 없이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을 주는 나라는 단연코 없다. 그런 나라는 국민이 주인이 아니고 공무원이 국민위에 군림하면 특권을 누리는 봉건국가이기 때문이다.
사기업이 3만원 이상의 경비를 지출할 때 세금계산서나 신용카드매출전표, 현금영수증 등 적격 영수증을 받지 않으면 가산세가 부과된다. 정부는 신용카드 사용에 대한 소득공제를 통해 세원 투명화를 꾀해 왔다. 반면 국가 고위공직자들은 특수활동비를 대부분 현금으로 집행, 세원 투명화에 역행해 탈세를 조장하고 있는 셈이다.
2. 국민의 알 권리 역시 중요한 납세자권리 중 하나다. 국민은 예산집행내역과 공무원이 일한 내용에 대한 공문서에 접근해서 세금의 오남용과 부패를 막고, 정보공개를 통해 언론출판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누려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다.
국정 2년차 과제를 논의한 워크숍에서 제공한 도시락 가격이 4만원이라고 공개되면 어떤 사람은 너무 비싸다고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그 정도면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도시락 값이 공개되지 않으면, 예산집행에 대한 국민의 ‘표현(평가)의 자유’가 원천적으로 박탈당한다. 도시락 구매를 결정하는 공무원들이 시가 9만원짜리 도시락을 반값에 제공받는 권력남용을 저지르더라도 영구히 그런 부패행위를 적발할 수도 없게 된다.
영부인의 단골 의상 디자이너가 청와대에 근무하거나 비싼 옷값에 대한 논란도 같은 맥락이다. 공개채용이나 지출내역 공개가 이뤄졌다면, “객관적이지 않다”는 식의 단순한 의심만으로 정부기관에 대한 신뢰를 훼손할 위험에 노출되지 않았을 것이다.
부패와 권력남용은 예산을 집행하고 비공개할 수 있는 특권에서 생긴다. 우리가 부패를 개인의 도덕성 문제가 아니라 제도의 문제로 보아 제도개선에 나서야 하는 이유다. 누구라도 견제되지 않는 특권을 가지면 부패 가능성이 높아진다.
정보공개법 제9조는 알 권리에 대한 예외규정을 두고 있다. 제9조의 비공개 사유가 있으면, 예컨대 국가안전보장ㆍ국방ㆍ통일ㆍ외교관계(2호)에 관한 내용은 비공개할 수 있다. 청와대는 특수활동비 모두가 비공개에 해당한다고 주장하지만 정보공개법 어디에도 그런 내용은 없다.
법원은 지금껏 국회ㆍ검찰ㆍ청와대 특활비 모두에 대해 ‘비공개 사유가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청와대는 3년간 진행된 1심 재판에서 특활비 중 국가안보, 외교와 관련 비용이 있는지 입증하지 않았다. 그래서 법원이 특수활동비 지출내역을 100% 공개하라고 판결한 것이다. 청와대가 만일 “특활비 181억원중에서 31억원은 국가안보상 지출됐다”고 입증했다면 법원은 31억원을 제외한 나머지 150억원에 대한 지출 내역을 공개하라”고 판결했을 것이다.
청와대는 사실상 특활비중 국가안보, 외교와 관련하여 사용한 것이 없다고 자인한 셈이다. 연맹은 특활비중 상당액이 박근혜 정부 청와대처럼 활동비 명목으로 비서관들이 나눠먹기식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실상 정기적인 임금이지만 세금이 없는 ‘비과세 임금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과 고위공직자에 있어 특수활동비는 독이 든 성배다. 엄청난 국민세금을 영수증 없이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는 대신에 감옥에 갈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청와대는 김정숙 여사의 옷값이 일부 현금으로 결제됐지만, 사비로 지출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문제는 그 주장의 진위를 수사를 하지 않으면 밝힐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특수활동비는 영수증을 첨부하지 않았도 되기 때문이다. 영수증이 모두 첨부돼 있다면 그 영수증만 보면 사적으로 유용됐는지 바로 확인이 돼 경찰 조사를 받지 않아도 된다.
또 대통령 입장에서는 영수증을 첨부하지 않기 때문에 직원들의 사적유용을 감사할 수 없고, 고위공직자는 사적사용 유혹에 넘어 갈 수 있는 것이다. 연맹이 지난 2017년 11월20일 발표한 성명서(특수활동비 폐지운동 본격돌입)에서 “문재인 정부는 삭감에 만족하거나 그것을 자랑할 게 아니라 퇴임후 리스크 방지를 위해서도 특수활동비를 마땅히 폐지해야 한다”고 한 이유다.
납세자연맹은 문재인 대통령과 그의 가족, 앞으로 모든 대통령 가족들이 감옥에 가는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 모두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국정원을 제외한 모든 부처의 특활비는 차기 정부에서 바로 폐지해야 한다.
윤석열 당선인은 앞서 검찰 재직 당시 사용한 특활비에 대해서도 정보를 공개하고, 이런 특권을 누린데 대해 국민에게 사과해야 한다. 임기 시작 후 올해 책정된 특활비 예산부터 영수증을 첨부하도록 해야 한다. 법률을 바꿀 필요도 없이 감사원과 기획재정부 특활비 예산지침만 바꾸면 가능한 일이다.
우리 납세자연맹은 오늘(4일) 헌법재판소에 ‘대통령기록물법’ 제11조 제1항의 조항이 위헌이라는 헌법소원과 헌법소원 결과가 나올 때까지 대통령기록물법 제11조 제1항의 효력을 정지해야 한다는 가처분신청을 함께 제기했다.
헌법재판소는 헌법이 규정된 공무원 특권을 없애고 국민의 알권리가 보장되는 진정한 민주국가를 세워주기 바란다. 우리는 헌재가 2017년 3월10일 발표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결정문 내용을 기억한다. 헌재는 당시 결정문에서 “대통령 탄핵심판에서 나타난 시대정신은 투명하고 공정한 권력행사로 나아갈 것을 명령하고 있다”고 밝혔다. 우리는 헌재가 당시 투명하고 부패없는 사회를 위한 국민의 열망에 화답하는 결정을 내렸기 때문에, 이번 건에 대해서도 문 대통령 임기 안에 가처분신청 인용결정을 내릴 것으로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