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띠리리리리리링, 띠리리리리링~”
“감사합니다. 납세자연맹 연말정산팀 입니다.”
(버럭 소리 지르며 다짜고짜) “뭐 하자는 겁니까?
지금 세법의 ‘세(稅)’자라도 알고 환급 신청하는 겁니까?”
우리 팀은 이 한통의 전화로 시작된 사건을 일명 ‘동울산의 난(亂)’ 이라고 말하지요.
한국납세자연맹에서 근무를 시작한지 약 2달째 되던 때의 일로 기억됩니다.
그날도 금방이라도 나를 덮쳐 버릴 것 같은 위태위태하게 쌓여져 있는 서류더미 옆에 붙어있는
제 책상 앞에서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려가며 회원님들이 우편으로 보내온 근로소득세 환급신청서를 검토하고 있었지요.
갑자기 전화기가 울렸고, 나름 반갑게 받았는데…. 다짜고짜 본인이 누군지도 밝히지 않고,
전화의 용건이 뭔지도 설명하지 않은 채 소리를 지르는 전화 한통.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가 그렇게 무섭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습니다.
동울산세무서에 근무하는 한 세무공무원의 전화였습니다. 연맹의 도움으로 ‘따로 사시는 부모님
소득공제’를 신청한 한 연맹회원님의 서류에 대한 세무공무원의 감정 섞인 문제제기였습니다.
신청한 회원님의 동생이 이미 ‘부모님(부양가족) 소득공제’를 받으신 상태였는데,
회원님이 세법을 잘 몰라 이중으로 신청을 하셨던 겁니다.
저에게 전화로 호통을 치셨던 그 세무서 조사관님은 “잔뜩 바쁜 소득공제 신청기간 때
이중으로 신청한 ‘부모님 공제 신청’ 때문에 시간이 지체됐고, 다른 일을 제 시간에 끝낼 수 없었다”면서
화가 난 이유를 설명하셨습니다.
연맹에 연말정산 도움을 요청하시는 회원님들의 경우 다른 형제들에 대한 소득공제 내용을 알려주시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연맹이 서류를 보완해 관할 세무서에 발송해 줄 때까지도 이런 문제를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통상은 상담 과정에서 다른 가족들이 앞서 다른 형제자매(내외)가 부모님에 대한 부양가족 공제를 받으신 건 아닌지를 꼭 확인합니다. 그런데 그 회원님은 동생이 이미 소득공제를 받으셨다는 것을 전혀 몰랐던 거죠.
시민단체 일 자체가 일반 사기업과 달리 이익창출을 목표로 하지 않기 때문에, 때로는 “내가 들이는 시간의 기회비용이 매우 클텐데…”라는 생각에 잠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작은 일도 끝까지 파고들어 납세자의 권리를 최종적으로 확인해 줬을 때의 ‘환희’와 ‘묘미’를 체험한 이상, 힘들어도 매일아침 만리장성처럼 쌓여 있는 서류더미 속으로 몸을 던지게 됩니다.
나를 통해 정당한 권리를 찾는 대한민국 납세자들의 한마디 “수고 하셨습니다. 환급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소리를 들을 때, ‘환희’와 ‘묘미’가 찾아옵니다.
그런데 무서운 세무공무원으로부터 이런 종류의 감정 섞인 전화를 받은 날은 ‘환희’와 ‘묘미’ 대신 ‘어떻게 해야 이곳을 빨리 떠나야 하나’라는 생각만 가득하죠. 1주일 남짓 수차례의 전화통화를 거쳐서 겨우 겨우 보완한 환급서류가 무용지물이 된 것에 대한 서러움.
서울 신문로빌딩 4층 창가에서 바라본 하늘은 그날따라 잔뜩 찌푸린 잿빛이더군요.
그렇게 20분 가량을 망연자실하게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습니다. 오기가 나더군요. 황당한 공격전화를 건 정체불명의 세무서 조사관이 도대체 누구인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5통 넘게 전화를 걸어 그 조사관의 실체(?)에 접근했습니다.
그리고 ‘복수의 전화’를 걸었습니다. ‘납세자보호’와 ‘친절세정’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던 국세청이 납세자의 실수에 대해 이렇게 감정적으로 대응하느냐는 게 반격의 컨셉. 하지만 상대방의 내공은 결코 녹록치 않았습니다. 전화를 건 순간 저는 2차 공격을 받았고 다시 주저앉았습니다. 스코어 2:0의 참패. 세무서 조사관님은 “똑바로 일하라”며 전화를 끊으셨죠.
2차 반격을 위해 칼을 간(?) 지 2시간. 마침내 다시 전화연결이 되었고 일단 그 조사관님을 5분 정도 괴롭혔습니다. 아무튼 그런 태도는 세무공무원이 납세자에 대한 바른 태도가 아니라는 게 제 반격의 주무기였습니다. 마침내 조사관님은 전화를 끊었고, 몇 분 뒤 그 조사관님의 상사님께서 사과의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그 상사의 말씀이 재미있습니다. “경상도 남자라서 ‘욱’하는 성격 때문에 그러니 이해 부탁한다.”는 말씀.
사과전화를 받았으니, “뭐 그럴수도, 아무튼 사과전화 감사합니다”는 식의 마무리 멘트를 날려야 했지만, ‘득의양양’한 기분에 한마디 더 꽂았습니다.
“그럼 동울산에 거주하시는 납세자분들은 그런 불친절함 속에서 세금에 대해서 상담 받으시고 신청하시나요? 그러실꺼면 홈페이지에 있는 ‘친절’ ‘신뢰’라는 단어는 빼주시기 바랍니다.”
솔직히 이렇게 세금관련 업무를 보면서 종종 실수를 하는데, 혹여 세법을 잘 모르는 일반 시민이 그랬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면 지금도 소름이 돋습니다. 그 시민이 내 가족이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뒷목을 잡아가며 끝까지 그 조사관의 사과를 받아 낸 게 아닌가 싶네요.
가끔 일을 하다보면 종종 실질적으로 부모님을 부양하지는 않지만 단순히 근로소득세 환급을 받고자 신청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럴 때마다 한 애니메이션에 나왔던 대사가 생각 나구요.
“사람은 양심을 갖고 태어나지 않는다.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건 식욕이나 물욕 같은 욕심뿐이래. 즉, 살아가는 본능 말이야. 양심은 몸이 성장하는 거랑 똑같이 자신 안에서 자라나는 마음이라고 하셨어. 양심은 개개인의 작품 같은 거라 오해 받거나 위선이라고 생각되기 쉬워. 그치만 토오루는.... 둥글기도 한 뾰족하기도 한 여러 가지 모양의 양심이 있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려 - 토오루 - ”
아무튼 세무서 조사관들이 친절과 정당함으로 납세자를 대해야 한다면, 납세자인 우리도 정당한 것을 요구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본인의 자제력이 모자라 정말 열심히 일하는 세무 공무원들의 이미지를 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본인의 양심을 속이는 작은 행동에 전국의 납세자를 모두 사기꾼으로 몰고 가는 사람도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서로의 신뢰가 바로 친절의 시작이며 신뢰의 시작은 아닐지.
오늘도 서울 광화문 신문로 빌딩 4층 제 자리에서 창밖을 봅니다. 여전히 바쁘지만, 오늘은 봄 햇살 탓인지, 괜히 기분이 뿌듯하네요.
<한국납세자연맹 자원활동가 나대경>
 댓글[8] |
| dikidogki [2009-04-15 14:2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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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고달픔이 있으실줄은 정말 몰랐네요;;; 중간에서 고생이 많으십니다~ 화이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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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mkim0216 [2009-04-15 14:3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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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우리나라 공무원들 정말 서비스마인드 바껴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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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nabro17 [2009-04-15 17:2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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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휴~ 정말 수고많으시네요~ 힘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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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sj245 [2009-04-15 17:3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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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고생을 많이 하시는지 몰랐네요. 이 글 읽고 연맹에 후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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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hlee [2009-04-15 19: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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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코너 '연맹의 점심시간' 볼 수록 중독성의 압박이!
괜히 좀 글이 좀 감동적인....나만 그런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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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o2269 [2009-04-16 10:4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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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왜 그러는지...쉼 호흡 크게 하구 한박자 쉬면 그렇치 않을텐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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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dsummer [2009-04-16 13:3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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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맹에서 이렇게 고생하시는 줄 미처 몰랐네요.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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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wk263 [2009-06-02 20: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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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무서에 근무하시는 높은양반님들아 경상도사람 욕보게 하지마세요 욱하는 성질있는넘들은 경상도사람이 아니데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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